만주국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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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국 위안은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 지역에서 통용된 통화이다. 만주 중앙 은행에서 발행되었으며, 초기에는 은본위제를 채택했으나 1935년 일본 엔에 연동되는 관리 통화 제도로 변경되었다. 다양한 액면과 디자인의 지폐와 주화가 발행되었으며, 일본 엔과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둥베이 은행에 의해 회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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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위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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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사용 국가 | 만주국 |
통화 기호 | M¥ (제공된 문서에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됨) |
통화 코드 | (ISO 코드 없음) |
보조 단위 | 리 (1/1000) 푼 (1/100) 자오 (1/10) |
사용 동전 | 5 리, 1 푼, 5 푼, 1 자오 |
사용 지폐 | 1 위안, 5 위안, 10 위안, 100 위안, 1000 위안 (일부 문서에는 5푼, 1각, 5각 지폐 정보도 있음) |
발행 기관 | 만주중앙은행 |
인쇄 | 대일본제국 내각인쇄국, 만주제국인쇄창 |
조폐국 | 만주중앙은행 조폐창 |
폐지 여부 | 예 |
비고 | 국폐 |
역사 | |
도입 시기 | 1932년 6월 |
폐지 시기 | 1945년 11월 |
이미지 | |
![]() |
2. 역사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그 이전까지 군벌 정권이 동삼성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기 위해 만주 중앙 은행법을 공포하고 만주 중앙 은행을 설립하여 만주국 위안을 발행했다. 초기에는 일본 은행에서 지폐와 동전을 제조 및 주조했지만, 나중에는 만주국 수도 신징 (현재의 창춘)에 있는 만주 중앙 은행의 조폐국에서 발행했다.[1]
만주국 위안 도입 전, 만주에서는 여러 지방 은행, 상업 은행, 은 제련소 및 전당포의 지폐 등 15가지 종류의 통화가 유통되었다. 만주국은 이러한 통화를 3년 동안 새로운 통화로 교환하도록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유통되던 구권의 95.4%가 교환되었다. 구권 지폐는 먼저 기계로 파쇄한 후 소각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새로운 화로를 건설해야 했다.[1]
만주국 위안은 중화민국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5]로 시작하여, 현 대양(위안스카이불, 쑨원 불이라고 불린 은전)과 같은 가치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1934년 미국에서 은 매입법이 성립되면서 세계적으로 은 가격이 폭등하고 중국 대륙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자,[5] 1935년 만주국은 위안화를 은본위제에서 폐지하고 일본 엔과 연동시키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만주국 위안은 일본 엔과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6] 같은 해 11월, 일본과 만주 양국 정부는 "만일 환율 등가 유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6], 일본 엔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 통화 제도로 전환했다. 1940년에는 만주국 위안이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만주국 위안은 지폐와 동전으로 발행되었다. 지폐는 100, 10, 5, 1 위안과 5 자오(0.5 위안)의 5가지 액면으로 발행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청나라의 중국 통치자를 앞면에 묘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1,000 위안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동전은 5 리부터 10 펀까지의 액면으로 발행되었다. 1944년과 1945년에는 골판지와 유사한 재질로 만들어진 1펀 및 5펀 동전이 발행되었는데, 이는 비금속 동전의 희귀한 예이다.
1945년 만주국 해산 후, 만주국 위안은 소련군이 발행한 군용 수표나 국민정부의 동북 유통권[10]보다 신용이 높아서, 얼마 동안 동북 유통권과 동일한 가치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1947년 (민국 36년) 봄, 일정 기간 내 신고 후 교환하는 방식으로 동북 유통권과 등가 교환이 실시되면서 유통이 금지되었다.[11] 1948년 (민국 37년), 약 의 만주 중앙 은행권은 동북 은행 지방 유통권[12]으로 교환되었다.
2. 1. 만주국 위안의 도입 (1932년)
1932년 (대동 원년) 만주국 건국과 함께, 그 이전까지 군벌 정권이 동삼성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幣制統一)하기 위해 만주 중앙 은행법(대동 원년 6월 11일 교령 제26호)을 공포하여 만주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신화폐(통칭·국폐)를 발행했다. 만주국 위안은 만주 중앙 은행에서 발행했다. 만주 중앙 은행은 1932년 7월 1일에 만주국 황제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개업했으며, 새로운 중앙 은행은 이 지역의 이전 4개 지폐 발행 은행의 자산을 인수하고 책임을 계속 수행했다. 하얼빈, 무크덴, 지린시, 치치하얼에 지점이 있었다.[1]만주국 위안이 도입되기 전에는 여러 지방 은행, 상업 은행, 은 제련소(yinchang으로 알려짐) 및 전당포의 지폐로 구성된 15가지 종류의 통화가 만주에서 유통되었다. 이러한 통화는 3년 동안 새로운 통화로 교환이 허용되었으며, 이 방법을 사용하여 여전히 유통되던 이전 만주 통화의 95.4%가 교환되었다. 오래된 지폐는 먼저 기계로 파쇄한 다음 소각했지만, 파괴해야 할 지폐의 수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화로를 건설해야 했다.[1]
만주국 국폐는 중화민국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5]로 시작했으며, 현 대양(위안스카이불, 쑨원 불이라고 불린 은전)과 등가로 간주되었다.
2. 2. 은본위제 폐지와 일본 엔 연동 (1935년)
1934년 (강덕 원년) 6월 미국에서 은 매입법이 성립되자, 세계적인 은 가격 폭등을 일으키고, 중국 대륙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다.[5] 이에 만주국 금융 당국은 1935년 (강덕 2년) 4월, 만주국 국폐를 은본위제에서 이탈시키고 일본 엔에 연동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같은 해 9월에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6] 같은 해 11월 4일, 일본·만주 양국 정부는 "만일 환율 등가 유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6], 일본 엔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했다.1930년대에 전 세계적인 은 가격 변동으로 인해, 만주국은 1935년에 ''위안''을 은본위제에서 폐지하고, 이후 고정 환율로 일본 엔에 고정했으며, 나중에는 근사한 패리티를 달성했다. 1940년에는 만주국 위안이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2. 3. 만주국 위안의 종류
만주국 위안은 여러 종류의 지폐와 동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지폐'''
만주 중앙 은행권(만중권)은 발행 및 개정된 순서에 따라 개조권, 갑호권, 을호권, 병호권, 병개정권, 정호권의 6종류로 분류된다.[27] 지폐의 액면은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 오각의 5종이 발행되었으며, 후에 일각(병호권), 오분(정호권)이 추가되었다.
개조권과 소액 지폐를 제외하고, 뒷면 중앙 하단에 "이 지폐는 만주국 정부가 대동 원년 6월 11일에 시행한 교령 제25호 화폐법에 의거하여 발행되었다"라는 발행 근거가 기재되어 있다.
- 개조권: 신 지폐 발행 전 임시 방편으로 사용된 지폐로, 구 동삼성관은호 현 대양표의 미가인권(서명, 날인이 없는 지폐)을 유용하였다.[34] 십 원권과 일 원권이 발행되었으며, 오 원권은 발행되지 않았다. 앞면에는 "만주 중앙 은행" 등의 문자가 붉은색으로 추가되었고, 뒷면에는 영문 은행명 위에 "THE CENTRAL BANK OF MANCHOU" 글자가 검은색으로 추가되었다.[34] 1932년 7월 1일 발행되었으며, 신 지폐(갑호권) 발행에 따라 회수되었다.
- 갑호권: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 오 각의 5종이 발행되었다. 오 각을 제외한 디자인은 공통으로, 앞면에 만주국 국기가 컬러로 인쇄되었다. 앞면 왼쪽에는 만주국 국기, 중앙에는 액면, 오른쪽에는 집정부 근민루가 그려졌다. 뒷면 하단에는 발행 근거와 화폐법 초록 제1조 및 제2조가 기재되었다. 1932년 9월 10일 오 각권 발행을 시작으로 1933년 6월 1일 오 원권까지 순차적으로 발행되었다.[35]
- 을호권: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 오 각의 5종이 발행되었다. 디자인이 전면 변경되어, 앞면 오른쪽에는 중국 고대 성인, 현인의 초상이, 뒷면에는 풍경, 건축물이 그려졌다. 앞면 중앙 상단에 국장, 중앙 하단에 "대일본제국 내각 인쇄국 제조" 명문, 뒷면 중앙 상단에 만주 중앙 은행 행장이 그려졌다. 일 원 이상 지폐 뒷면에 몽골 문자로 "원"과 동의어인 "투그릭"에 의한 액면이 기재되었다. 1935년 11월 1일 오 각권 발행을 시작으로 1938년 4월까지 순차적으로 발행되었다.
- 병호권: 일 각이 추가되어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 오 각의 총 6종이 발행되었다. 앞면 디자인은 소폭 변경되었고, 뒷면은 백 원과 일 원의 디자인이 개정되었다. 일 각 소액 지폐만 "만주 제국 인쇄창 제조"라고 기재되었다. 오 각권은 1941년 8월, 나머지는 1944년 4월 이후 발행되었다.
- 병개권: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의 4종이 발행되었다. 병호권과 디자인은 동일하지만 색조 등이 약간 다르다. 백 원권만 "만주 제국 인쇄국 제조", 나머지는 "대일본제국 내각 인쇄국 제조"라고 기재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권종이 만주 국내에서 제조되었다. 백 원권을 제외하고 번호가 폐지되고 기호만 부착되었다. 1944년 11월에 발행되었다.
- 정호권: 오 분, 오 각, 일 천 원의 3종이 제조되었다. 일 천 원권만 "만주 제국 인쇄창 제조"라고 기재되었으며, 색조가 다른 2종이 존재한다. 오 분 소액 지폐, 오 각권 모두 발행일 불명, 일 천 원권은 1944년 11월부터 제조되었지만 미발행으로 끝났다.[29]
권명 | 액면 | 이미지(앞) | 이미지(뒤) | 크기 (가로×세로:mm) | 발행 시기 | 앞면 도안 | 뒷면 도안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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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권 | 일 원 | -- | -- | 155×71 | 1932년(대동 원년) 7월 1일 | 정원 | 꽃 무늬 | 구 동삼성관은호 현 대양표 가쇄권 |
오 원 | 160×77 | 미발행 | ||||||
십 원 | 167×85 | 1932년(대동 원년) 7월 1일 | ||||||
갑호권[35] | 오 각 | -- | -- | 122×70 | 1932년(대동 원년) 9월 10일 | 꽃 무늬 | 꽃 무늬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일 원 | -- | -- | 142×81 | 1932년(대동 원년) 12월 20일 | 만주국 국기와 근민루 | 화폐법 제1조·제2조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오 원 | -- | 151×86 | 1933년(대동 2년) 6월 1일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십 원 | -- | -- | 162×93 | 1932년(대동 원년) 11월 10일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백 원 | -- | -- | 182×103 | 1933년(대동 2년) 4월 10일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을호권 | 오 각 | -- | -- | 118×64 | 1935년(강덕 2년) 11월 1일 | 조공명 | 문방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일 원 | -- | -- | 127×68 | 1937년(강덕 4년) 12월 1일 | 공자 | 장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오 원 | -- | -- | 137×74 | 1938년(강덕 5년) 7월 1일 | 맹자 | 만주국 국무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십 원 | -- | -- | 147×80 | 1937년(강덕 4년) 7월 1일 | 조공명 | 만주 중앙 은행 총행(본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백 원 | -- | -- | 168×91 | 1938년(강덕 5년) 4월 11일 | 대성전과 공자 | 양떼 무리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병호권 | 일 각 | -- | -- | 103×52 | 1944년(강덕 11년) 9월 15일 | 꽃 무늬 | 묘우 | 소액 지폐 기호만 |
오 각 | -- | -- | 119×65 | 1941년(강덕 8년) 8월 | 조공명 | 문방 | 중은권 기호만 | |
일 원 | -- | -- | 127×68 | 1944년(강덕 11년) 4월 1일 | 공자 | 꽃 무늬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오 원 | -- | -- | 137×74 | 1944년(강덕 11년) 4월 1일 | 맹자 | 만주국 국무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십 원 | -- | -- | 147×80 | 1944년(강덕 11년) 4월 1일 | 조공명 | 만주 중앙 은행 본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백 원 | -- | -- | 168×91 | 1944년(강덕 11년) 11월 10일 | 대성전과 공자 | 곡물 창고 (대두사일로)[36]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병개권 | 일 원 | ![]() | -- | 128×68 | 1944년(강덕 11년) 11월 | 공자 | 꽃 무늬 | 중은권 기호만 |
오 원 | 137×74 | 1944년(강덕 11년) 11월 10일 | 맹자 | 만주국 국무원 | 중은권 기호만 | |||
십 원 | -- | -- | 147×80 | 1944년(강덕 11년) 11월 10일 | 조공명 | 만주 중앙 은행 본점 | 중은권 기호만 | |
백 원 | -- | -- | 168×91 | 1944년(강덕 11년) 11월 10일 | 대성전과 공자 | 곡물 창고 (대두 사일로)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 |
정호권 | 오 분 | -- | -- | 94×48 | 발행일 불상 | 꽃 무늬 | 탑 | 소액 지폐 기호만 |
오 각 | -- | -- | 127×64 | 발행일 불상 | 대성전 | 운룡 | 중은권 기호만 | |
일 천 원 | -- | -- | 180×104 | 미발행 | 대성전과 공자 | 만주 중앙 은행 본점 | 중은권 기호·번호 있음 색조 차이 2종 존재 |
'''동전'''
동전은 5리, 1펀, 5펀, 1자오(10펀)의 액면으로 발행되었다. 1944년과 1945년에는 골판지와 유사한 재질로 만들어진 1펀 및 5펀 동전이 발행되기도 했다.
1945년 2월에는 금속 주화 대용으로 마그네 화폐가 발행되었다.[26] 마그네 화폐는 경소 마그네시아(마그네사이트를 소성한 산화 마그네슘)를 주성분으로 하였으며, 오분 및 일분 마그네 화폐가 발행되었다.
만주국 위안 동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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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액면가 | 기술적 매개변수 | 설명 | 최초 주조일 | |||||
지름 | 두께 | 질량 | 구성 | 가장자리 | 앞면 | 뒷면 | |||
5 리 | 21mm | 3.5g | 청동 | 민무늬/매끄러움 | 만주국 국기가 안쪽 진주 원 안에 있고, "⋆國洲滿大⋆ 年三同大" 텍스트 | 액면가를 꽃 화환으로 표시 | 1933-1934 (대동 2–3) | ||
5 리 | 21mm | 3.5g | 청동 | 민무늬/매끄러움 | 만주국 국기가 안쪽 진주 원 안에 있고, "⋆國洲滿大⋆ 年元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꽃 화환으로 표시 | 1934-1939 (강덕 1–6) | ||
-- | 1 펀 | 24mm | 4.9g | 청동 | 민무늬/매끄러움 | 만주국 국기가 안쪽 진주 원 안에 있고, "⋆國洲滿大⋆ 年二同大" 텍스트 | 액면가를 꽃 화환으로 표시 | 1933-1934 (대동 2–3) | |
-- | 1 펀 | 24mm | 4.9g | 청동 | 민무늬/매끄러움 | 만주국 국기가 안쪽 진주 원 안에 있고, "⋆國洲滿大⋆ 年二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꽃 화환으로 표시 | 1934-1939 (강덕 1–6) | |
-- | 1 펀 | 19mm | 1.6mm | 1g | 알루미늄 | 민무늬/매끄러움 | 만주국 황실 문장; "• 國洲滿大 • 年八德康" 텍스트 | 벼 화환 안의 액면가 | 1939-1943 (강덕 6–10) |
-- | 1 펀 | 16mm | 0.55g | 알루미늄 | 물결무늬 | 숫자 "1"; "• 國帝洲滿 • 年一十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나누는 꽃 카르투슈; 위와 아래 구름 | 1943-1944 (강덕 10–11) | |
1 펀 | 0.62g | 적색 또는 갈색 섬유 재질 | 민무늬/매끄러움 | 숫자 "1"; "• 國帝洲滿 • 年二十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나누는 꽃 카르투슈; 위와 아래 구름 | 1945 (강덕 12) | |||
5 펀 | 20mm | 1.5mm | 3.5g | 구리-니켈 | 민무늬/매끄러움 | 연꽃; "⋆ 國洲滿大 ⋆ 年三同大" 텍스트 | 두 마리 용 사이 액면가 위의 진주 | 1933-1934 (대동 2–3) | |
5 펀 | 20mm | 3.7g | 구리-니켈 | 민무늬/매끄러움 | 연꽃; "⋆ 國洲滿大 ⋆ 年元德康" 텍스트 | 두 마리 용 사이 액면가 위의 진주 | 1934-1939 (강덕 1–6) | ||
5 펀 | 21mm | 1.6mm | 1.2g | 알루미늄 | 민무늬/매끄러움 | 원 안의 큰 숫자 "5"; "• 國洲滿大 • 年十儀溥" 텍스트 | 액면가 위에 만주국 황실 문장; 아래 꽃 화환 | 1940-1943 (강덕 7–10) | |
5 펀 | 19mm | 0.75g | 알루미늄 | 물결무늬 | 숫자 "5"; "• 國帝洲滿 • 年一十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나누는 꽃 카르투슈; 위와 아래 구름 | 1943-1944 (강덕 10–11) | ||
![]() | 5 펀 | 20mm | 2.3mm | 1.2g | 적색 또는 갈색 섬유 재질 | 민무늬/매끄러움 | 숫자 "5"; "• 國帝洲滿 • 年一十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나누는 꽃 카르투슈; 위와 아래 구름 | 1944-1945 (강덕 11–12) |
-- | 1 자오 | 23mm | 5g | 구리-니켈 | 민무늬/매끄러움 | 연꽃; "⋆ 國洲滿大 ⋆ 年三同大" 텍스트 | 두 마리 용 사이 액면가 위의 진주 | 1933-1934 (대동 2–3) | |
-- | 1 자오 | 23mm | 5g | 구리-니켈 | 민무늬/매끄러움 | 연꽃; "⋆ 國洲滿大 ⋆ 年五德康" 텍스트 | 두 마리 용 사이 액면가 위의 진주 | 1934-1939 (강덕 1–6) | |
1 자오 | 21mm | 3.5g | 구리-니켈 | 물결무늬 | 두 개의 페가수스; "• 國洲滿大 • 年七德康" 텍스트 | 액면가 위에 만주국 황실 문장과 양식화된 일출 및 구름 | 1940 (강덕 7) | ||
1 자오 (10 펀) | 23mm | 1.7g | 알루미늄 | 물결무늬 | "Fundo" 중량의 윤곽선 안의 숫자 "10"; "• 國洲滿大 • 年九德康" 텍스트 | 액면가 위에 만주국 황실 문장과 두 개의 벼 이삭 | 1940-1943 (강덕 7–10) | ||
1 자오 (10 펀) | 22mm | 1mm | 1g | 알루미늄 | 민무늬/매끄러움 | 숫자 "10"; "• 國帝洲滿 • 年十德康" 텍스트 | 액면가를 나누는 꽃 카르투슈; 위와 아래 구름 | 1943 (강덕 10) |
2. 4. 만주국 위안의 몰락 (1945년)
1945년 만주국 해산 후, 만주 중앙 은행은 소련군에 접수되었다. 그럼에도 만주국 위안은 소련군 발행 군용 수표나 국민정부의 (동북 유통권)[10]보다 신용이 높았다. 만주국 위안은 얼마 동안 동북 유통권과 같은 가치로 유통되었으나, 1947년 (민국 36년) 봄, 일정 기간 신고 후 교환하는 방식으로 동북 유통권과 등가 교환이 실시되면서 유통이 금지되었다.[11] 1948년 (민국 37년), 약 의 만주 중앙 은행권은 [12]으로 교환되었다.3. 화폐 발행 및 관리
만주국 위안은 초기에는 일본 은행에서 제조 및 주조되었으나, 나중에는 만주 중앙 은행의 조폐국에서 발행되었다. 만주 중앙 은행은 1932년 7월 1일에 개업했으며, 이 지역의 이전 4개 지폐 발행 은행의 자산을 인수하고 책임을 계속 수행했다.[1]
만주국 위안이 도입되기 전 만주에서 유통되던 15가지 종류의 통화는 3년 동안 새로운 통화로 교환이 허용되었으며, 이 방법을 통해 이전 만주 통화의 95.4%가 교환되었다. 오래된 지폐는 먼저 기계로 파쇄한 다음 소각했지만, 파괴해야 할 지폐의 수가 너무 많아서 모든 오래된 종이 돈을 태우기 위해 새로운 화로를 건설해야 했다.[1]
1935년, 만주국은 ''위안''을 은 본위제에서 폐지하고 일본 엔에 고정시켰으며, 1940년에는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이 기간 동안 발행된 지폐 가치의 약 절반은 현물 준비금으로 뒷받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1,000 ''위안''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위안은 10 ''자오''(角), 100 ''푼''(分) 또는 1000 ''리''(釐)로 세분되었다. 동전은 5 ''리''부터 10 ''푼''까지의 액면으로 발행되었다. 1944년과 1945년에는 골판지와 유사한 재질로 만들어진 동전(1 및 5 ''푼'')을 발행하기도 했다.
1948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약 120억 ''위안''의 만주 중앙 은행 지폐가 둥베이 은행에 의해 환수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이 지폐를 인쇄했지만, 만주국 무크덴 시의 옛 중국 조폐창을 수리한 후에는 만주 제국 인쇄국에서도 지폐를 인쇄했다.
만주국은 1932년 (대동 원년)에 건국되었으며, 봉천군벌이 동삼성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기 위해 만주 중앙 은행법을 공포하여 만주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신화폐(국폐)를 발행했다. 만주국 국폐는 은본위제[5]로 시작했으며, 현 대양(위안스카이불, 쑨원 불)과 등가로 간주되었다.
1934년 (강덕 원년), 미국에서 은 매입법이 성립되자 세계적으로 은 가격이 폭등하고 중국 대륙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만주국 금융 당국은 1935년 (강덕 2년) 만주국 국폐의 은 연동에서 이탈하고 일본 엔에 연동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 1935년 11월 4일, 일본·만주 양국 정부는 "만일 환율 등가 유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6], 일본 엔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했다.
1945년 (강덕 12년) 만주국 해산 후, 만주 중앙 은행은 소련군에 접수되었으나, 소련군 발행 군용 수표나 국민정부 법폐· 동북 유통권[10]보다 신용이 높았고, 얼마 동안 동북 유통권과 동일한 가치로 유통되었다. 1947년 (민국 36년) 동북 유통권과의 등가 교환이 실시되었고, 이후 만주국 국폐 유통은 금지되었다.[11] 1948년 (민국 37년), 약 12억 원의 만주 중앙 은행권은 동북 은행 지방 유통권[12]으로 교환되었다.
만주국에서 발행된 모든 경화는 봉천시의 "만주중앙은행 조폐창"(현재의 선양 조폐창)에서 제조되었다.
3. 1. 만주 중앙 은행
1932년 7월 1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재의 창춘)에서 만주 중앙 은행이 개업했다. 개업식에는 만주국 황제가 직접 참석했다. 만주 중앙 은행은 이 지역의 이전 4개 지폐 발행 은행의 자산을 인수하고 책임을 계속 수행했다.[1] 하얼빈, 무크덴, 지린시, 치치하얼에 지점이 있었다.만주국 위안이 도입되기 전에는 만주에서 여러 지방 은행, 상업 은행, 은 제련소(yinchang), 전당포 등이 발행한 다양한 지폐가 유통되었다. 만주국은 이러한 구 지폐들을 회수하여 3년 동안 새로운 통화와 교환해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유통되던 구 만주 통화의 95.4%가 교환되었다. 오래된 지폐는 기계로 파쇄한 후 소각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새로운 화로를 건설해야 했다.[1]
1932년 (대동 원년) 만주국 건국 후, 군벌 정권이 동삼성에서 독자적으로 발행하던 화폐를 통일하기 위해 만주 중앙 은행법(대동 원년 6월 11일 교령 제26호)을 공포하여 만주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신 화폐(통칭·국폐)를 발행했다. 만주국 국폐는 중화민국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5]로 시작했으며, 현 대양(위안스카이불, 쑨원 불이라고 불린 은전)과 등가로 간주되었다.
1934년 (강덕 원년) 6월, 미국에서 은 매입법이 성립되자 세계적으로 은 가격이 폭등하고 중국 대륙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만주국 금융 당국은 1935년 (강덕 2년) 4월, 만주국 국폐의 은 연동에서 이탈하고 일본 엔에 연동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같은 해 9월에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 일본·만주 양국 정부는 "만일 환율 등가 유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6], 일본 엔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했다.
1945년 (강덕 12년) 8월 18일 만주국이 해산되고, 같은 해 8월 20일에 만주 중앙 은행이 적군 (소련군)에 접수된 후에도, 소련군 발행의 군용 수표 (군표)나 국민정부의 법폐· 동북 유통권[10]보다 신용이 높았고,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동북 유통권과 동일한 가치로 유통되었다. 1947년 (민국 36년) 봄, 일정 기간 내 신고 교환 방식에 의한 동북 유통권과의 등가 교환이 실시되었고, 이후 만주국 국폐 유통은 금지되었다.[11] 1948년 (민국 37년), 약 12억 원의 만주 중앙 은행권은, 동북 은행 지방 유통권[12]으로 교환되었다.
만주 중앙 은행권(만중권)은 발행 및 개정된 순서에 따라 개조권, 갑호권, 을호권, 병호권, 병개정권, 정호권의 6종류로 분류된다.[27] 지폐 액면은 화폐법(대동 원년 6월 11일 교령 제25호) 제4조에 의거, 백 원, 십 원, 오 원, 일 원, 오각의 5종이 발행되었으며, 후에 소액 지폐 발행에 관한 건(강덕 11년 8월 14일 칙령 제224호)에 의거 일각(병호권), 오분(정호권)이 추가되었다.
중앙은행권은 일본의 내각인쇄국에 제조가 위탁되었지만,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점령 지역 확대와 그 지역에서 사용할 각종 지폐 제조가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중앙은행권 제조는 뒤로 미루어졌다. 관부연락선이 미국 해군잠수함의 위협에 노출되자, 만주국 경제 당국은 일본의 육군, 대동아, 대장 각 성과 협상하여 만주국이 필요로 하는 지폐는 만주 국내에서 제조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강덕 11년)에 내각인쇄국과 톳판 인쇄, 다이닛폰 인쇄 각 회사로부터 요판, 볼록판, 평요판 등의 인쇄 기계 수십 대를 양도받아, 만주 제국 인쇄창(국)에서 인쇄가 이루어졌다(병개권). 지폐에 사용하는 용지는 지린 특수 제지와 만주 콩대 펄프를 직할 제지 공장으로 하여, 펄프에 기존의 중앙은행권을 용해하여 회수한 삼지닥나무를 혼입한 것을 사용했다.[28] 대동아 전쟁 심화로 만주 국내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지폐 사용량이 급증했기 때문에, 새롭게 천 원 권 제조에 착수했지만, 제조 도중에 종전을 맞이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29]
만주국에서 발행된 모든 경화는 봉천시의 "만주중앙은행 조폐창" (현재의 선양 조폐창)에서 제조되었다. 1932년(대동 원년) 12월, 만주중앙은행은 재무부로부터 구 봉천성 조폐창의 불하를 받았지만, 만주 사변 이후 1년 이상 기계를 가동하지 않아 설비도 낡았기 때문에 오사카의 조폐국에서 조폐 기술자와 숙련공을 초빙하고, 신형 기계 구입 및 양도 등을 통해 공장을 재정비했다. 1933년(대동 2년) 3월 20일, "만주중앙은행 조폐창"을 정식으로 설립하고, 5월 1일부터 신 경화 제조를 시작하여 5월 20일부터 발행을 시작했다.
3. 2. 화폐 발행 법규
1932년 (대동 원년) 6월에 공포된 "화폐법"(대동 원년 6월 11일 교령 제25호)[13]으로 만주국의 화폐가 규정되었다. 법안 작성 담당자는 남만주철도 이사인 수토 마사토시[16]이다. 공포 당시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17][18]조항 | 내용 |
---|---|
제1조 | 화폐의 제조 및 발행 권한은 정부에 속하지만 만주중앙은행이 대행한다. |
제2조 | 순은 23.91그램이 가격의 단위로 정해지고 통화의 명칭은 원으로 정해졌다. |
제3조 | 통화 단위는 십진법 표기가 채택되어 1원=10각=100분=1000리로 규정되었다. |
제4조 | 화폐의 종류가 9종으로 규정되어 지폐는 백원, 십원, 오원, 일원, 오각의 5종, 경화는 백동 화폐가 일각, 오분 2종, 청동 화폐가 일분, 오리의 2종으로 규정되었다. 1939년(강덕 6년)의 개정[19]으로 경화의 재질에 관한 표기가 삭제되어 경화는 일각, 오분, 일분, 오리의 4종으로 규정되었다. |
제5조 | 화폐의 강제 통용력이 규정되어 있으며, 지폐는 무제한, 주화(경화)는 100개까지 법화로서 통용된다고 규정되었다. |
제6조 | 일각 및 오각의 백동 화폐, 일분 및 오리의 청동 화폐의 량목, 소재 및 품위가 정해져 있었다. 1939년(강덕 6년)의 개정[19]으로 제4조의 개정과 동시에 제6조가 삭제되어, 제7조를 제6조로 하여 "화폐의 양식, 제조, 발행, 훼손된 화폐 교환 및 소각, 그리고 주화의 소재, 품위 및 량목에 관해서는 칙령으로 이를 정한다"로 개정됨과 동시에 이후의 각 조가 앞당겨졌다. |
제7조 (→ 제6조) | 화폐의 양식, 제조, 발행, 훼손된 화폐의 교환·소각에 관해서는 교령으로 정한다. |
제8조 | 현저하게 오염되거나 마모·훼손된 화폐는 액면 가격으로 수수료 없이 만주중앙은행에서 교환한다고 규정되었다. |
제9조 | 주화에 대해서는 모양의 인식이 어려운 것과 사적으로 극인을 한 것,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화폐 가치를 잃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
제10조 | 만주중앙은행은 지폐 발행에 즈음하여, 그 발행고의 3할 이상에 상당하는 은괴, 금괴, 확실한 외국 통화[20], 외국 은행[21]에 대한 금은 예치금을 보유하는 것으로 발행 준비액으로 하고 있다. |
제11조 | 발행 준비액을 제외한 지폐 발행고에 대해서는 공채 증서, 정부가 발행·보증하는 어음, 기타 확실한 증권·상업 어음을 보유하는 것으로 신용을 담보했다. |
제12조 | 만주중앙은행은 지폐 및 주화의 발행고·준비의 증감을 기록한 출납 일보와 매주 평균 고표를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함과 동시에 매주 평균 고표를 공고한다고 규정하고, 일반에 대해서는 주 1회, 매주 평균 고표를 『만주국 정부 공보』 및 『정부 공보』에 공고했다. |
제13조 | 정부는 만주중앙은행에 대해 화폐의 제조 및 발행을 감독할 것을 정하고 있으며, 관리관은 언제든지 화폐의 발행고·미발행고 및 장부를 검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
제14조 | 종래 유통되던 주화 및 지폐에 관해서는 "구 화폐 정리 방안"의 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규정되어, 1932년(대동 원년) 7월에 시행된 "구 화폐 정리 변법"(대동 원년 6월 27일 교령 제37호)에 의해, 구 지폐 15종은 2년간, 일정 환산율로 신 화폐와 동일한 효력을 갖게 하고, 구 주화(봉천성 십진 동원)는 5년간, 신 화폐의 일분 청동 화폐와 동일한 효력을 갖게 하고, 각각 기간 만료 후에는 그 효력을 잃는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구 화폐는 만주중앙은행의 총분지점에서 신 화폐로 교환하며, 유통 기한 만료인 1934년(강덕 원년) 6월 말까지 93.1%의 회수율을 보였다. 그럼에도 약 1000만 원의 미회수분이 있었고, 소지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구 지폐 교환의 건"(강덕 원년 5월 22일 재정부 포고 제6호)으로 교환 기간을 1년 더 연장하여, 최종적으로 97.2%의 회수율을 달성했다.[22] |
그램의 한자 표기는 제정 당초에는 일본과 같은 "와(瓦)"가 사용되었지만, 1933년(대동 2년) 4월의 "화폐법 중 개정의 건"(대동 2년 4월 19일 교령 제22호)[23]에서 중국어의 "공분(公分)"으로 고쳐졌고, 1939년(강덕 6년) 10월의 "화폐법 중 개정의 건"(강덕 6년 10월 12일 칙령 제265호)[19]에서 다시 "와(瓦)"로 고쳐졌다.
화폐법 제2조에서 순은 23.91그램(현 대양의 순은량)의 가격을 기준으로 "원"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제도상으로는 은 본위제에 상당하지만, 조문에 태환에 관한 규정이 없고, 동 제4조에도 본위 화폐인 은화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초부터 은에 연동하는 관리 통화로서 발족했다고 여겨진다.[24]
1944년 (강덕 11년) 8월에 공포된 "소액 지폐 발행에 관한 건"(강덕 11년 8월 14일 칙령 제224호)[25]에 의해, 주화의 대용으로 소액 지폐가 발행되었다.
조항 | 내용 |
---|---|
제1조 | 정부는 주화에 대용하기 위해, 임시·필요에 따라 만주 중앙 은행을 통해, 일각, 오분, 일분의 소액 지폐를 발행할 수 있다. |
제2조 | 주화와 마찬가지로 소액 지폐는 100매까지 법화로서 통용한다. |
제3조 | 본 법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은 화폐법(대동 원년 교령 제25호)의 규정에 따른다. |
동시에 공고된 일각 소액 지폐에 관한 만주 중앙 은행 공고에서 "본 소액 지폐는 기호만으로 하고 번호는 붙이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 소액 지폐는 기호만 기재되었다. 또한 동 공고에서는 지폐를 의미하는 "권"이 아닌 "소액 지폐"로 표기하여 구별하고 있다. 이 법규에 의해 일각, 오분 소액 지폐가 발행되었지만, 일분 소액 지폐는 발행되지 않았다.
1945년 (강덕 12년) 2월에 공포된 "마그네 화폐 발행에 관한 건"(강덕 12년 2월 5일 칙령 제6호)[26]에 따라 금속 주화의 대용으로 마그네 화폐가 발행되었다.
조항 | 내용 |
---|---|
제1조 | 정부는 주화를 대신하기 위해 임시 및 필요에 따라 만주 중앙 은행을 통해 오분 및 일분 마그네 화폐를 발행하게 할 수 있다. |
제2조 | 주화와 마찬가지로 100장까지 법화로 통용된다. |
제3조 | 마그네 화폐의 주성분은 경소 마그네시아(마그네사이트를 소성한 산화 마그네슘)로 하고, 중량은 오분 마그네 화폐는 0.9그램, 일분 마그네 화폐는 0.62그램으로 규정했다. |
제4조 | 본 법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은 화폐법(대동 원년 교령 제25호)의 규정에 따른다. |
마그네사이트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 화폐 카탈로그』 등에서 "마그네사이트 화폐"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본 조항에 따라 공식 표기는 "마그네 화폐"이다.
3. 3. 위조 방지 대책
만주 제국 인쇄창(국)에서 인쇄된 지폐는 당시 화북에서 미중 연합군이 중국 연합 준비 은행이 발행하는 롄인권의 정교한 위조 지폐를 공중 살포하여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시카타 마스조 대륙과학원 부원장의 노력으로 내몽골 지역의 염호에서만 자라는 조류를 착색하여 용지에 넣는 위조 방지책을 마련했다.[33]4. 한국과의 관계
만주국 위안은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1935년 일본 제국은 만주국 내 조선은행 발행 조선은행권(금표)과 요코하마 정금 은행 발행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초표)을 만주국 위안으로 통일하는 정책을 결정했다.[7] 이를 위해 조선은행 영업을 통제하고,[8]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 발행을 금지했다.[9] 일본 측은 만주국 위안 사용을 권장했고, 관동군과 남만주철도는 만주국 위안으로 지불하도록 했다.
이러한 통화 정책은 만주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 위안은 은 본위제에서 일본 엔과의 고정 환율제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1935년 미국 은 매입법으로 인한 국제 은 가격 폭등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5] 이후 만주국은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하여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6] 1940년에는 만주국 위안이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만주국 위안은 1932년 만주국 건국과 함께 도입되었으며, 초기에는 일본 은행에서 지폐와 동전을 제조했다.[1] 만주국 위안 도입 이전에는 만주 지역에 여러 지방 은행 등이 발행한 다양한 지폐가 유통되었으나, 만주국 정부는 이를 회수하여 새로운 통화로 교환했다.[1]
1945년 만주국 해산 이후에도 만주 중앙 은행권은 소련군 발행 군표나 국민정부의 법폐보다 신용이 높아 한동안 유통되었다.[10] 그러나 1947년 동북 유통권과의 등가 교환이 실시되면서 유통이 금지되었고,[11] 1948년에는 다른 화폐로 교환되었다.[12]
4. 1. 일제강점기 조선은행권과의 관계
1935년 11월 4일, 일본 제국 정부는 "만주국의 국폐 가치 안정 및 幣制 통일에 관한 건"을 각의 결정하였다.[7] 이 결정에 따라 만주 국내에서 유통되던 조선은행 발행 조선은행권(금표)이나 요코하마 정금 은행 발행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초표)은 적절한 시기에 만주국 위안으로 통일되었다. 이를 위해 만주 국내 조선은행 영업에 필요한 통제를 가하고,[8]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 발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9] 또한, 일본 측 관민은 만주국 위안 사용을 권장받았고, 관동군과 남만주철도는 가능한 한 만주국 위안으로 지불하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금표와 초표는 회수되었고, 만주 국내 통화는 만주국 위안으로 통일되었다.4. 2. 경제적 영향
만주국 위안은 은 본위제에서 일본 엔과의 고정 환율제로 전환되면서 만주국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1934년(강덕 원년) 6월에 미국에서 은 매입법이 성립되자, 세계적인 은 가격 폭등을 일으키고, 중국 대륙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만주국 금융 당국은 1935년 (강덕 2년) 4월, 만주국 위안화를 은본위제에서 이탈시키고 일본 엔에 연동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같은 해 9월에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5] 같은 해 11월 4일, 일본·만주 양국 정부는 "만일 환율 등가 유지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6], 일본 엔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만주국 내 통화의 통일을 가져왔다.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를 중심으로 관동주의 법정 통화였던 조선은행 발행의 조선은행권(금표)이나 요코하마 정금 은행 발행의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초표)도 사용되었지만, 1935년 (쇼와 10년) 11월 4일에 일본 정부가 "만주국의 국폐 가치 안정 및 幣制 통일에 관한 건"을 각의 결정한 것으로 인해[7], 만주 국내에서 유통되던 일본 측 은행권은 적절한 시기에 국폐로 통일되었다. 이를 위해 만주 국내에서의 조선은행의 영업에 필요한 통제를 가하고[8], 요코하마 정금 은행권의 발행 금지 조치를 취하고[9], 일본 측 관민의 국폐 사용을 권장하여, 관동군·남만주철도는 가능한 한 국폐로 지불하도록 노력했다. 이로 인해 금표·초표는 회수되었고, 만주 국내의 통화는 만주국 국폐로 통일되었다.
1940년에는 만주국 위안이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1945년 만주국 멸망 이후에도 만주국 위안은 소련군 발행의 군용 수표나 국민정부의 법폐, 동북 유통권[10]보다 신용이 높았다.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동북 유통권과 동일한 가치로 유통되었지만, 1947년 (민국 36년) 봄에, 일정 기간 내의 신고 교환 방식에 의한 동북 유통권과의 등가 교환이 실시되었고, 이후 만주국 국폐의 유통은 금지되었다.[11] 1948년 (민국 37년), 약 12억 원의 만주 중앙 은행권은 다른 화폐로 교환되었다.[12]
4. 3. 역사적 관점
만주국 위안은 1932년 (대동 원년) 만주국 건국과 함께 도입되었다. 만주 중앙 은행법에 따라 설립된 만주 중앙 은행이 신화폐(국폐)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일본 은행에서 지폐와 동전을 제조 및 주조했지만, 나중에는 만주국 수도 신징(현재의 창춘)에 있는 만주 중앙 은행 조폐국에서 발행했다.[1]만주국 위안 도입 이전에는 만주 지역에 여러 지방 은행, 상업 은행 등이 발행한 다양한 지폐가 유통되었다. 만주국 정부는 이러한 구 지폐들을 회수하여 새로운 통화로 교환하는 정책을 3년간 시행하여, 기존 통화의 95.4%를 회수했다. 오래된 지폐는 기계로 파쇄 후 소각 처리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새로운 화로를 건설해야 할 정도였다.[1]
만주국 위안은 처음에는 은본위제[5]로 시작하여, 중화민국의 은화와 등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35년 (강덕 2년) 미국의 은 매입법으로 인해 국제 은 가격이 폭등하면서, 만주국은 은본위제를 폐지하고 일본 엔에 고정 환율로 연동시켰다.[6] 이후 관리 통화 제도로 전환하여 일본 엔과 완전히 등가가 되었다. 1940년에는 만주국 위안이 미국,[2] 독일 및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대한 만주국의 수출입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3]
발행된 지폐는 100, 10, 5, 1 위안과 5자오(0.5 위안)의 5가지 액면으로, 청나라의 중국 통치자를 앞면에 묘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000 위안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위안은 10 자오, 100푼, 또는 1000리로 세분되었고, 동전은 5리부터 10푼까지의 액면으로 발행되었다. 1944년과 1945년에는 골판지와 유사한 재질로 만들어진 1푼 및 5푼 동전이 발행되기도 했다.[1]
1945년 만주국 해산 이후에도 만주 중앙 은행권은 소련군 발행 군표나 국민정부의 법폐보다 신용이 높아 한동안 유통되었다.[10] 그러나 1947년 동북 유통권과의 등가 교환이 실시되면서 유통이 금지되었고,[11] 1948년에는 동북 은행 지방 유통권으로 교환되었다.[12]
만주국에서 발행된 모든 경화는 봉천시(현재의 선양)의 "만주중앙은행 조폐창"(현재의 선양 조폐창)에서 제조되었다. 만주 사변 이후 설비가 낡아 오사카의 조폐국에서 기술자와 기계를 도입하여 공장을 재정비하고, 1933년부터 신경화 제조 및 발행을 시작했다.
5. 평가 및 의의
만주국 위안은 일제 강점기 만주국에서 사용된 화폐이다. 그 가치와 디자인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는데,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화폐의 재질이 조악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만주국의 경제 상황과 일본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중요한 지표로 평가된다.
참조
[1]
간행물
JAPANESE SPONSORED COIN AND BANK NOTE ISSUES FOR THE OCCUPIED REGIONS OF CHINA
http://thecurrencyco[...]
The Currency Collector
2018-04-11
[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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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nn.sagepu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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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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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1984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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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Cornell University
1988-07-08
[5]
문서
純銀23.91グラムの価格を基準としていたが、[[本位貨幣]]の銀貨は発行されなかったため、満洲国及び満洲中央銀行の信用に基づく[[不換紙幣]]だった。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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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満洲国の国幣価値安定及幣制統一に関する件
https://ndlsearch.nd[...]
[8]
문서
[[1936年]](康徳3年)の満洲興業銀行法(康徳3年12月3日[[勅令]]第172号)により、朝鮮銀行在満支店、満洲銀行、正隆銀行を統合して[[満洲興業銀行]]が設立された。
[9]
문서
「関東州等ニ於ケル横浜正金銀行券発行禁止等ニ関スル件」(昭和11年9月22日勅令第335号)
[10]
문서
[[中華民国中央銀行]]により、東北九省(旧満洲国領域)のみで通用する紙幣として発行された。
[11]
서적
『満州脱出』39頁
[12]
문서
[[中国共産党]]配下の{{仮リンク|東北行政委員会|zh|東北行政委員會 (1946年-1949年)}}が設立した{{仮リンク|東北銀行|zh|东北银行|preserve=1}}が発行した紙幣。
[13]
문서
日本の[[貨幣法]](明治30年3月29日法律第16号)と区別するため、日本国内では「満洲国貨幣法」と表記した。
[14]
문서
[[菱苦土鉱|マグネサイト]]を原材料に使用した硬貨。
[15]
문서
1944年(康徳11年)12月に発行期日の10日前に改正。
[16]
웹사이트
満洲中央銀行沿革史 (通報号外 ; 第44号)
https://dl.ndl.go.jp[...]
[17]
간행물
『満洲國政府公󠄁報日譯』第13号、1932年(大同元年)6月11日、1-2頁
1932-06-11
[18]
문서
満洲国では[[日本語]]も[[公用語]]だったため、法律等も全て[[中国語]]と日本語の両形式で公布されている。
[19]
간행물
「貨幣法中改正ノ件」『政府公報』第1649号、1939年(康徳6年)10月12日、328-329頁
1939-10-12
[20]
문서
実質的には日本円(朝鮮銀行券)に当たる。
[21]
문서
実質的には朝鮮銀行に当たる。
[22]
서적
『満洲中央銀行十年史』94-96頁
[23]
간행물
「貨幣法中改正ノ件」『満洲國政府公報日譯』第122号、1933年(大同2年)4月21日、2頁
1933-04-21
[24]
서적
『満洲中央銀行十年史』110頁
[25]
간행물
『政府公報』第3052号、1944年(康徳11年)8月14日、203頁
1944-08-14
[26]
간행물
『政府公報』第3193号、1945年(康徳12年)2月5日、49頁
1945-02-05
[27]
문서
1935年(康徳2年)10月16日の「満洲中央銀行行報」に掲載された銀行布告第85号で、1935年(康徳2年)11月以後から従来新紙幣と称していた物を甲号紙幣(甲号券)と改称し、以降、改正して発行する新紙幣は乙、丙、丁、戌等を冠するとした。
[28]
서적
『満州脱出』215-216頁
[29]
서적
『満州脱出』218頁
[30]
법령
「満洲中央銀行ノ発行スル貨幣ノ様式並ニ製造発行損幣引換及銷却ニ関スル件」(大同元年7月2日教令第46号)第4條
[31]
법령
「満洲中央銀行ノ発行スル貨幣ノ様式並ニ製造発行損幣引換及銷却ニ関スル件中改正ノ件」(大同元年9月10日教令第83号)
[32]
법령
「満洲中央銀行ノ発行スル貨幣ノ様式並ニ製造発行損幣引換及銷却ニ関スル件中改正ノ件」(康徳8年6月30日勅令第171号)
[33]
서적
『満州脱出』215-217頁
[34]
간행물
「財政部總長ノ認可ヲ受ケ滿洲中央銀行紙幣ノ暫定様式ヲ左ノ通リ定ム」『満洲国政府公報日譯』第21号、1932年(大同元年)7月5日、25頁
1932-07-05
[35]
문서
発行当初は「新紙幣」と呼称したが、1935年(康徳2年)の銀行布告第85号で「甲号紙幣」と改称し、甲号券又は甲号○○券と称した。
[36]
간행물
政府公報』第3195号(康徳11年11月4日)の公告で裏面図形について「中央ニ興農增粮穀出荷ノ風景圖ヲ配ス」と説明されている
[37]
간행물
鋳貨ノ素材、品位及量目ニ關スル件
政府公報』第1649号
1939-10-12
[38]
간행물
満洲中央銀行新鋳貨
政府公報』第1649号
1939-10-12
[39]
간행물
康徳六年勅令第二百六十六號鋳貨ノ素材、品位及量目ニ關スル件中改正ノ件
政府公報』第1861号
1940-08-01
[40]
간행물
新鋳貨公告
政府公報』第1861号
1940-08-01
[41]
서적
満州脱出
[42]
서적
旧満洲国貨幣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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